나치 시대의 일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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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저자 데틀레프 포이케르트는, 이 책 『나치 시대의 일상사 - 순응, 저항, 인종주의』의 집필 의도를 “나치즘을 근대의 병리사(病理史)로 ‘경험’하려는 것”이라는 말로 집약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 ‘경험’이라는 단어에 방점을 찍음으로써, 이 책을 ‘독일의 나치 시대’라는 시공간적 한계로부터 벗어나게 만든다.
여기서 ‘경험’이란, “1930년대와 1940년대 사람들의 인지 및 행위 방식”과, 그들의 인지 및 행위 방식이 낳은 증거와 결과에 대한 우리의 논의라는, 상호 연관된 두 가지 차원을 의미하는데, 포이케르트는 특히 이 두 차원의 극단적 분리를 우려하면서 “과거와 대면하는 역사가(歷史家) 자신의 ‘상심(傷心, Betroffenheit, 과거에 대한 망각과 미화를 막아주고 그 과거의 피해자들과 화해하게 해주며 가해자들을 용서하게 해주는 기제)’을 가로막게 되며, 독일의 과거에 대한 우리의 물음이 우리 현재의 경험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점을 불명료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2003년 현재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다시금 나치 시대의 유의미성에 맞닥뜨리게 된다.
포이케르트의 지적 속에서 독일의 과거, 즉 나치 시대를 우리의 일제 강점기로 치환할 경우, 이는 상심도 없고 제한된 물음으로 현재의 경험마저 제한하는 우리 자신에 대한 우려로 읽힐 수 있다. 물론 독일인이 바라보는 나치 시대와 우리가 바라보는 일제 강점기를 동일선상에 놓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러한 독법이 가능한 것은, 우선 포이케르트가 “작은 사람들(kleine Leute)”의 일상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고, 또한 “우리의 부모와 조부모들이 겪었던 경험들을 필연성에 함몰되지 않은 채 준거로 삼아서 우리 자신의 생활세계가 제기하는 도덕적․정치적 도전에 맞서”는 것이야말로 진정 과거에 대한 책임 있는 성찰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상사의 영역
포이케르트의 일상에 함께 주목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가 말하는 일상, 즉 일상사의 영역에 유의해야 한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출간 붐이 일고 있는 생활사나 지역사 혹은 향토사는, 포이케르트의 일상사와는 거리가 멀다. 그가 주목하는 일상사의 영역은, 우선 ‘체제와 연관되는 일상’으로 국한되며, 거기에 “아래로부터의 역사”라는 방향성이 추가된다. 여기서 “아래”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되는 사람들, 즉 “작은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따라서 포이케르트가 말하는 일상사란, “작은 사람들”이 체제를 어떻게 경험했는가의 역사가 된다.
단, 이 때 “작은 사람들”이란 계급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노동운동을 주도하는 노동조합의 지도부는 “아래”가 아니다. 반면 노동조합의 지도부의 지휘에 어떤 식으로든 반응하는 일반 노동자는 “아래”이다. 포이케르트는 이런 “아래”의 범주에 노동자와 더불어 수공업자와 소상인 등의 중간신분, 그리고 청소년을 포함시킨다.
“작은 사람들”이 원한 것
이렇게 규정된 일상사의 영역으로서의 일상은, 곧 나치즘과 관련된 본질적인 질문을 제기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한다. 포이케르트는 작은 사람들의 일상을 관찰하면서, 당대 독일인들이 나치즘에 보낸 지지와 기대가 무엇이고 그 기대는 얼마나 충족되었는지, 그 충족의 정도에 따라 어떻게 저항이 나타나고 그 저항은 어떤 면모들을 띠었는지, 나치즘은 그에 어떻게 반응했으며 그 반응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결국 인종주의적 학살로 귀결되었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변을 얻는 열쇠를 “정상성(Normalität)”에 대한 작은 사람들의 희구에서 찾는다.
여기서 작은 사람들이 희구한 “정상성”이란 일자리와 질서를 의미한다. 그러나 포이케르트는 정상성에 대한 작은 사람들의 희구를 낳은 위기, 즉 나치즘을 낳은 위기를 단지 경제 위기로 국한시키지 않는다. 그는 이를 서구 부르주아 사회의 일반적 위기이자 근대성의 위기로 파악한다. 따라서 나치즘은 더 이상 전근대성의 산물로 묶여 있을 수 없으며, 반드시 근대성과의 연관 속에서 파악될 수밖에 없게 된다.
나치즘, 근대성의 본질적 측면
나치즘을 근대성 내지 근대화와 연관지을 때 역사가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근대 개념에 함축되어 있는 규범적, 해방적 측면이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나치즘이 해방적이었다는 이상한 함축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이케르트는, 해방의 근대 이면에 규율과 억압의 근대가 자리하고 있었다는 푸코의 논리를 이용함으로써, 나치즘의 해방적 측면과 억압적 측면을 동시에 드러내고 더 나아가서 나치즘의 야만성을 근대성의 본질적 측면으로 해석해낸다.
포이케르트의 이러한 해석이 가장 두드러지는 곳은 청소년에 대한 서술에서이다. 나치 체제 하에서 청소년들에게 제공되었던 해방의 공간은 나치 체제의 다극적 권위 체제로부터 기인한다. 한쪽에는 국가기관으로서의 일반적 교육기관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히틀러 청소년단 및 독일소녀단이라는 나치당 산하 조직이 있다. 그리고 양자간에는 어떤 고정된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청소년들은 나치당의 권위를 이용해 학교의 권위와 더불어 부모의 권위로부터도 해방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해방을 촉진시켰던 이러한 동력이 나치 청소년 정책의 궁극적 목표인 “군인적 인간”의 생산과 어긋날 경우 즉각 나치에 의해 억압이 가해졌는데, 그러한 억압이 가해졌던 1939/40년 무렵 이에 반항한 청소년 집단, 즉 에델바이스 해적과 스윙 청소년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들 집단이 나치즘에 대항하면서 펼쳤던 활동이 해방적이었다는 점으로 인해, 나치 시대에 나타난 근대화의 면모가 모두 나치즘에 의해 기인한 것이 아니며 때로는 나치즘에 대항하는 와중에 출현했던 것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사회적 규범의 강제수단으로서의 인종주의
에델바이스 해적과 스윙 청소년들에 대한 나치의 조치는 또한 나치 시대의 인종주의에 대한 시각을 열어준다. 나치는 이들 일탈적 청소년들을 인종주의적 실험의 장소였던 수용소에 수감하고서, 그들을 인종주의적 분류법에 따라 분류하고, 감시하고, 교육하고, 생식기를 절단하는 수술을 하고, 때로는 학살했다. 이는 나치가 사회적인 일탈을 인종주의적 시각에서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을 드러내는데, 즉 어떤 개인의 인종 형질을 확인하고 이를 그의 사회적 태도와 연결시키기보다 오히려 사회적 일탈을 확인하고 그것에서 유전 형질을 유추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나치의 인종주의는 특정한 사회적 규범을 강제하는 수단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그 사회적 규범의 핵심은, 푸코가 서양 근대문명의 핵심으로 강조한 ‘규율’이다. 즉 나치즘의 가장 야만적인 계기인 인종주의가 서양 근대문명의 중핵을 표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나치즘은 서양 근대문명의 표현이다. 다만 병리적 차원의 표현이다.
저자소개
김학이: 한국외대 독어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 서양사학과에서 석사, 독일 보쿰대학교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논문으로 「나치즘과 운동」 「나치 경제정책과 자동차산업 - 나치 근대화론에 대한 고찰」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 기업가와 정치」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독일의 통일과 위기』『나치스 민족공동체와 노동계급』『분열과 통일의 독일사』『정당사회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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